황규백의 작품세계
국립현대미술관 왕신연 (Wang Shinyoun)
2021년의 시점에서 황규백(1932~)의 1970년 이후 반세기에 걸친 작품세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판화작업 30년과 회화작업 20년의 세월을 함께 들여다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 그는 한국 판화사에서는 매우 드물게 메조틴트라는 기법으로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며 평론가나 미술시장의 평가를 넘어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판화가로서 입지를 굳건히 했다. 그러던 그가,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과감하게 매체를 바꾸고 회화작업으로 전향했다. 이 행보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당시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언어를 지켰다는 것이다. 1970년대 팝아트와 플럭서스의 새로운 시도들이 범람하던 뉴욕에서도, 개념적인 미술과 미디어, 설치작업이 목소리를 높이던 2000년대 서울에서도 그는 표현 매체만 판화에서 회화로 바꾸었을 뿐, 그의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언어는 바꾸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에 접근하는 핵심은 그가 전달하고자 한 언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소한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그의 작품 속 소재들은 초현실적이며 시적인 생명력을 머금고 있다. 이 소재들은 보는 이를 엄숙하게 만드는 ‘정교하고 치밀한 손작업’을 통해 작가로부터 신비한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이들이 평안한 분위기 속 작품 안에서 서로 간에, 또는 작품 밖으로 관람객에게 던지는 시적인 문답과 대화들이 작가 황규백의 언어다. |
그의 작품이 주는 평안함은 일상적으로 친숙한 사물과 장소를 소재로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상자나 손수건, 나무판 같은 한정된 공간 위, 또는 벽에 가까운 가장자리 공간임을 보여주는 사물에 바짝 붙은 그림자들은 작품의 소재들이 황망한 공간에 덩그렇게 던져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 기댈 곳이 있고 무엇인가에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는 안정된 상황 속에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가 부여한 그림 안의 사물들이 지닌 생명력은,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사이의 위치를 전복시킨다. 이것은 매우 시적인 ‘역할의 역전’이다.1) 그의 작품 앞에서 관람객은 보이는 것이 되고, 그림 속 사물이 보는 것이 되는 역전을 통해, 관람자는 그의 작품 속 공간의 고요한 평안함에 동참하게 된다. 실제로 그는 그림 안에서 살고 있다. 2000년, 그는 이탈리아의 프레스코화를 답습하고 귀국한 후 6개월에 걸쳐 작업실 전체를 벽화로 채웠다. 대리석 기둥들과 체리, 창문과 푸른 하늘이 그려진 벽화를 배경으로 하는 그의 작업실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우산이고, 꽃과 나무, 그리고 새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펼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그 평안하고 고요한 시선에 자신을 맡기고 조용한 대화에 동참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전 세계적인 전염병 상황을 비롯한 온갖 소란스러운 바람을 삶의 한 가운데에서 맞으며 버텨내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의 작품과의 만남이 더욱 소중해지는 이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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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백 미술재단 연락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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