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이 좋은 사람”:
순수함과 선량함의 세계를 시적인 미술로 표현하는 작가, 황규백
2021년 5월 어느 햇살 밝은 날, 황규백(Hwang Kyu Baik, 黃圭伯, 1932-) 작가를 처음 만났다. 서울의 어느 주택가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이자 전시공간에서였다. 실제로 만난 작가의 첫인상은 아흔이 넘은 나이가 믿어지지 않게 중년의 신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건강하고 정갈하고 또 세련된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맵시 있는 안경 너머 선한 눈빛으로 방문객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나이가 지긋하고 연륜이 쌓이고 게다가 성공한 사람들은 거침이 없는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압도할 수 있는데, 황규백 작가는 오히려 조심스럽게 자신을 낮추며 주변을 편안하게 해주는 모습이었다. 흔히들 작가의 인생과 작품은 분리될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들려주는 작가의 작품세계는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 오롯이 닮아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작가는 거듭해서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 행운만 따르겠는가? 사실은 이것은 그의 삶의 태도였다. 인생의 고난과 굴곡은 접어두고 자신에게 찾아왔던 좋은 것들만을 간직하고 감사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군대에서 4년간 복무하고 제대한 직후 다시 징집될 위기가 있었지만 이것은 파리로 떠나게 된 마음 속 계기가 되었고, 그동안 벌었던 돈을 지인에게 맡겼다가 잃고 망연자실 하였지만 이것은 파리에서 뉴욕으로 가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새로운 것을 해야만 한다는 집념은 인생의 마디마디에 프랑스, 미국, 다시 한국으로 나라를 이동해가며, 회화, 판화(메조틴트), 다시 회화로의 작품세계의 전환을 이룰 수 있는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것도, 전쟁의 참상도, 사회의 부조리도, 외로움도 그를 비관적이거나 파괴적으로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좀 더 정제되고 단련되어 그를 고요하고 순수한 자신만의 세계로 이끌었다.
물론, 1968년 파리로 가는 배에서 알게 된 일본인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파리의 “S.W. 헤이터 아틀리에 17”에서 수학하게 되어 당시 파리에서 주류미술이 된 판화의 세계로 입문하게 된 것은 작가에게 운명 같은 행운이었다. 파리에서 다양한 기법을 습득하며 판화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무렵, 이 모든 것을 두고 미국으로 진출할 것을 제안한 화상의 도움과 메조틴트(Mezzotint)라는 17세기부터 이어진 서구의 전통 동판화기법에 집중하게 된 것도 그에겐 구사일생의 행운이었다. |
또한 마치 마법처럼 다가온 행운의 순간도 있었다. 작품구상으로 오랜 기간 고뇌하던 시기, 뉴욕 근교 베어마운틴의 잔디밭에서 손수건을 덮고 누워있던 그에게 순간적으로 하얀 손수건이 하늘에 떠 있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것을 판화로 구현하는 열흘 정도의 과정은 무슨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설렘과 흥분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이 <풀밭 위의 하얀 손수건(White Handkerchief on the Grass)>(1973)이라는 작품은 그에게 영국 브래드포드 판화비엔날레(1974)에서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주었고, 이후 그는 수많은 작품을 통해 메조틴트 기법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현대화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이 오르게 된다. 메조틴트 분야에서 황규백 작가보다 먼저 두각을 나타낸 마리오 아바티(Mario Avati, 1921-2009)나 하마구치 요조(Hamaguchi Yozo, 1909-2000)가 검은색의 어두운 화면을 구사했다면, 그는 빛과 색이 부각될 수 있는 회색화면을 사용함으로써 독보적인 판화가로 우뚝 서게 된다.
이 작품을 비롯해서 황규백 작가가 해온 판화작업은 그가 오랜 시간 연구하고 연마해온 판화재료와 도구, 기법을 보여주는 것이며, 완벽함에 이르고자 하는 숙련과 인고의 노동의 결과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처럼 높은 수준의 결과물을 얻기까지의 작업 과정이 아닌 오로지 작품 자체로만 말한다. 그는 뉴욕에서 이러한 ‘노동집약적인’ 예술을 한해에 10여 점을 만들어낸다는 목표로 30년을 매진했다. 그 결과 작가로서 미술사에 자리매김을 하며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는 또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한다.
이 작품을 비롯해서 황규백 작가가 해온 판화작업은 그가 오랜 시간 연구하고 연마해온 판화재료와 도구, 기법을 보여주는 것이며, 완벽함에 이르고자 하는 숙련과 인고의 노동의 결과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처럼 높은 수준의 결과물을 얻기까지의 작업 과정이 아닌 오로지 작품 자체로만 말한다. 그는 뉴욕에서 이러한 ‘노동집약적인’ 예술을 한해에 10여 점을 만들어낸다는 목표로 30년을 매진했다. 그 결과 작가로서 미술사에 자리매김을 하며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는 또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한다.
다시 회화로! 다시 고국으로!
그에게는 ‘회화와 판화’라는 애증의 관계를 풀어야할 숙제가 있었다. 흔히 판화는 회화라는 모체가 있어야 하고, 회화에 비해 기술적 제약으로 인해 표현하고 싶은 것을 100% 표현하지 못한다는, 소위 ‘판화의 결핍’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결핍은 황규백 작가에겐 오히려 자신만의 개성, 나아가 작가 자신을 보여주는 마치 맞춤양복과도 같은 딱 맞는 표현방식이 된다. 바로 ‘시와 같은 그림’이다. 그의 작품들은 일관되게 ‘구상과 추상’, ‘초현실과 현실’ 사이를 잇는 절제된 표현을 보여준다. 작품의 중심이 되는 손수건, 우산, 우체통, 의자, 바이올린 등의 일상적 사물들은 그 비율이나 배열의 어긋남을 통해 비일상성을 띄게 된다. 즉,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언캐니(uncanny)한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것은 예민함이 요구되는 처리과정과 겹겹이 쌓인 반복노동이 투입되지만 결국에는 시각적으로 간결한 결과물이 도출되는 판화의 역설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판화는 표현이 거세되어 쉽게 쉽게 찍어낸 거친 단순함이 아니라, 화면 위에 보이지 않게 응축된 섬세한 손길을 담은 절제된 결정체이기 때문에, 산문이 아닌 시의 미술이 된다. 이제 그의 시적인 그림들은 판화든 회화든 그 장르나 매체는 상관이 없다. 2000년, 자신이 원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는 나이 칠십, 종심(從心)을 바라보며 한국으로 돌아온 화가에게 그 어떤 것도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이후 회화에 매진한 지 어언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좋은 작품을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림을 그린다. 최근 수년 동안 ‘재-전성기’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은 새로운 대작들을 쏟아내고 있는데, 여전히 그림 외에는 그 어떤 욕심 없이 금욕적으로 작품에 임한다. 100세까지라도 좋은 작품을 남기겠다는 일념으로 마음이 급하다. |
황규백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도 생각나고,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도 생각나고, 샤갈(Marc Chagall, 1887-1985)도 생각난다. 그러나 재현의 거부, 생각의 그림을 추구했던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회화나, 사람이 부재하고 건물들이 기이하게 등장하며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를 던져주는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배경 속 신비롭고 행복한 사랑의 꿈을 그렸던 샤갈의 회화와는 달리, 황규백 작가는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대상들, 이를 테면 고국에서 오는 어머님의 편지와 이를 전달해주던 우체통, 어머님의 자수가 바느질된 커다란 천, 사람의 형상을 닮은 반쯤 펼쳐진 우산, 좋아하는 음악을 상징하고 예쁜 형상을 갖고 있는 바이올린 등의 사물과 함께, 하늘과 풀밭, 산과 호수, 달과 꽃, 나비와 백조와 같은 자연을 조화시키고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초현실주의를 지향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부각시키고 싶은 대상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배치하고 그 크기를 자유롭게 조정함으로써 그림은 현실을 벗어나 초현실, 아니 꿈과 이상향을 그리는 것이다.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 복잡한 철학이나 역사, 형이상학, 정신분석은 필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순수하고 선한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과 지향이 필요하다.
황규백 작가는 좋은 예술은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주는 큰 보약이라고 말한다. 좋은 예술을 대하는 순간 인간의 마음가짐은 선량해지고 욕심으로부터 멀어지는 무아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믿는다. 인간은 좋은 미술, 좋은 음악, 좋은 책, 무엇보다 아름다운 자연을 접하게 되면, 나라는 존재는 어느덧 사라지고 황홀한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따라서 우리는 영혼이 맑아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좋은 예술을 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평생을 바쳐 예술에만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예술을 만들어가는 기쁨과 긍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이 주는 보약을 계속 섭취했기 때문에 그렇게 나이의 한계를 훌쩍 넘어 강건할 수 있었나 보다.
작가가 말하는 행운은 이처럼 예술 하나를 바라면서 끊임없이 여러 가지를 모색해보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의 성품의 선량함이 예술로 이어진 것인지, 예술을 함으로써 선량해진 것인지 그 전후를 가릴 수 없지만, 인간 황규백은 자신의 작품만큼이나 선량하다. 무엇보다 한눈팔지 않고 예술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결정적 기회들을 감지할 수 있는 민감성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행운이 된 것이다.
노화가는 젊은이들에게 세계로 나가서 도전하라고 말한다. 이미 지나칠 정도로 글로벌화 된 세상에서 이런 조언이 그들에게 어떤 울림으로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포착한 작은 행운을 묵묵히 노력하며 자신만의 예술의 세계로 충만하게 일구어온 대가로서 설파할 수 있는 당부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그의 그림을 만난 행운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천은 이 세상과는 닮은 듯 닮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 순간일지언정 그 순수하고 선량한 아름다움에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닐까?
황규백 작가는 좋은 예술은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주는 큰 보약이라고 말한다. 좋은 예술을 대하는 순간 인간의 마음가짐은 선량해지고 욕심으로부터 멀어지는 무아지경에 이르게 된다고 믿는다. 인간은 좋은 미술, 좋은 음악, 좋은 책, 무엇보다 아름다운 자연을 접하게 되면, 나라는 존재는 어느덧 사라지고 황홀한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따라서 우리는 영혼이 맑아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좋은 예술을 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평생을 바쳐 예술에만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예술을 만들어가는 기쁨과 긍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이 주는 보약을 계속 섭취했기 때문에 그렇게 나이의 한계를 훌쩍 넘어 강건할 수 있었나 보다.
작가가 말하는 행운은 이처럼 예술 하나를 바라면서 끊임없이 여러 가지를 모색해보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의 성품의 선량함이 예술로 이어진 것인지, 예술을 함으로써 선량해진 것인지 그 전후를 가릴 수 없지만, 인간 황규백은 자신의 작품만큼이나 선량하다. 무엇보다 한눈팔지 않고 예술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결정적 기회들을 감지할 수 있는 민감성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행운이 된 것이다.
노화가는 젊은이들에게 세계로 나가서 도전하라고 말한다. 이미 지나칠 정도로 글로벌화 된 세상에서 이런 조언이 그들에게 어떤 울림으로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포착한 작은 행운을 묵묵히 노력하며 자신만의 예술의 세계로 충만하게 일구어온 대가로서 설파할 수 있는 당부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그의 그림을 만난 행운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천은 이 세상과는 닮은 듯 닮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 순간일지언정 그 순수하고 선량한 아름다움에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닐까?
2021 6월 김정아 (인류학자,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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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백 미술재단 연락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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